"화학 구조 시각화는 진화한다…예술성과 함께"

영국 화학자, 화학 시각화의 발전 과정 조명 논문 눈길

종이·펜에서, 1980년대 이후엔 소프트웨어 3D기법으로


00visual88.jpg »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한 다양한 3차원 화학 구조들. 출처/ K. Harrison et al.(2013)


“화학 구조를 이해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화학자들은 연구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시각화를 이용해야 했다.…분자 화학 구조는 원자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지고, 그 원자는 다시 지극히 작은 핵과 전자구름으로 구성되며, 거기에서 결합은 양자 분포의 전자그룹들이 중첩되어 생성된다. 어느 것도 실험을 통해 직접 볼 수 없으며, 오로지 엑스선이나 중성자 빔의 교란과 회절을 통해 추론될 뿐이다. 그래서 화학자들은 연구 대상인 분자들의 화학적 속성과 반응을 보여주는 도식들을 고안해왔다.”


소와 분자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화학자들이 사용해온 도식과 그림들은 그동안 꾸준히 발전하며 변모해왔다. 종이와 펜으로 그려지던 그림, 화학 기호를 사용한 기호식들은 가장 전통적인 도구였다. 이제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3차원 그림들이 더욱 익숙해졌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화학과의 칼 해리슨(Karl Harrison, 화학정보기술센터) 등은 최근 물리 학술 데이터베이스인 아카이브(arXiv.org)에 화학 분야의 시각화 기법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현재의 컴퓨터 시각화 기술을 개괄하는 논문을 발표해 눈길을 끌고 있다 (정식출판 이전에 공개된 논문이라 짜임새가 완결적이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흥미로운 주제와 소재를 다루고 있어 그 내용 일부를 간추려 여기에 소개한다).

00visual6.jpg » 화학식과 간단한 그림을 이용해 화학 구조와 화합물-단백질 상호작용(맨오른쪽)을 표현하던 전통적인 방식. 출처/ K. Harrison et al.(2013)

저자들이 논문에 정리한 이야기를 보면, 1950, 60년대에는 타자기와 인쇄활판을 이용해 화학 구조를 표현하던 시절이 있었고, 또한 화학 지식이 발전하면서 전문적인 일러스트레이터를 고용해 화학 구조의 그림을 그려 출판하는 일도 생겨났다. 그러면서 당시에 화학자, 생물학자들과 함께 작업을 하며 과학 지식의 출판과 확산에 기여하는 예술 분야의 일러스트레이터들도 등장했다. 저자들은 1960년대에 단백질 구조와 효소 구조를 밝힌 첫 연구논문을 보여주는 삽화를 그렸던 어빙 가이스(Irving Geis: 1908-1997)를 이 시대의 대표적 삽화가로 꼽았다.


00visual7.jpg » 종이에 화학 구조 그림을 그릴 때 쓰던 도구들. 로트린 펜과 도형 자, 그리고 레트라셋(사식문자). 출처/ K. Harrison et al.(2013) 1970년대 말~1980년대 중반에는 새로운 도구가 화학자들의 연구실 공간을 차지했다. 저자들은 “(이 시기에) 많은 과학 저자들이 로트링 펜(Rotring pen), 플라스틱 도형 자, 그리고 레트라셋(Letraset, 종이에 문질러 문자를 붙이는 사식문자)을 사용하는 전문가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숙련되지 않은 화학자들한테는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이런 도구를 사용해 사진촬영용 삽화를 만들어내려는 일러스트레이터들한테는 이제 잉크가 번지고 종이가 찢어지는 일이 걱정거리가 됐다”고 덧붙였다.


퓨터를 사용한 시각화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저자들은 1980년대 중반, 특히 “1984년”을 중요한 해로 지목했다. 마우스 달린 애플 매킨토시에 탑재된 맥드로(MacDraw)와 맥페인팅(MacPainting)이라는 그림 소프트웨어가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그것은 혁신이었다”고 평했다.


00visual2.jpg »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3차원 화학 구조를 그릴 수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막대 모형, 공과 막대 모형, 원자의 크기를 확장해 빈 공간을 채운 반구 모형, 크기 비율을 조절한 공과 막대 모형. 출처/ K. Harrison et al.(2013) 전문 소프트웨어가 등장한 건 뒤이어 불과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86년에 케임브리지소프트라는 소프트웨어 회사가 등장하면서, 매킨토시용 소프트웨어 켐드로(ChemDraw)가 첫 선을 보였다. 저자들은 이 소프트웨어가 화학계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으며 그 결과로 오늘날까지 화학 분야에서는 데스크톱 컴퓨터로 여전히 매킨토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전한다. 1994년 윈도용 켐드로 3.1도 나왔다. 켐드로는 현재 출판물의 표준이 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많은 학술저널들이 이런 파일 포맷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소프트웨어와 함께 3차원 화학 구조의 그림 제작이 활발해졌다. 갖가지 방식으로 화학 구조의 시각물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막대로 표현하는 모형, 공과 막대를 이용한 모형, 원자의 지름에 비례해 원자의 공 모양을 키워 공간을 가득 채우는 반구 모형 등등이 등장했다.

00visual11.jpg » 단순하게 시각화하는 기법을 사용해 표현한 단백질 구조. 출처/ K. Harrison et al.(2013)

00visual4.jpg »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한 디엔에이(DNA)의 3차원 구조 그림들. 출처/ K. Harrison et al.(2013) 또한 기본 구조(1차 구조)들이 서로 결합해 매우 복잡한 2차 구조를 이룰 때에, 이를 비교적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반복적 연결구조나 패턴을 다면체로 단순화해 시각화하는 기법들도 등장했다. 그 덕분에 아미노산이 매우 복잡하게 결합한 단백질의 3차원 구조는 얇은 종이 모양(sheet)과 나선 모양(helics)으로 비교적 단순하게 표현될 수 있게 됐다고 저자들은 말했다.


문에서 화학 구조 그림에 등장하는 원자의 색에 관한 설명은 특히 흥미롭다. 원자 그림에는 널리 통용되는 색이 칠해지는데, 예컨대 탄소는 검게, 수소는 하얗게 표현되곤 한다. 실제 원자가 그런 색과 본질적인 연관을 지니는 것도 아닌데, 원자마다 고유한 색깔이 칠해지는 것은 사실상 표준처럼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원소의 색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원칙은 아니다.


"흥미로운 개념 중 하나는 색깔의 사용이다. 물론 색깔은 삽화에서 유용한 특징을 보여준다. 따로 표식을 달지 않고도 그 그림에 어떤 원소들이 있는지 나타낼 수 있다. 물론 어떤 색깔을 써야 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은 빨간 원자는 산소를 의미한다고 인식한다. 그런데 왜 빨강인가? 하얀 수소, 파란 질소는 또 어떤가? 우리는 아마도 탄소가 검다고 알고 있다. 이런 색 선택은 흑연이 검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일까? 하지만 탄소만으로 이뤄진 다이아몬드는 검지 않다.…

 결국에 지켜야 하는 표준의 관행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도 삽화가(illustrator)의 몫이며, 어떤 경우에 산소를 자줏빛으로, 탄소를 핑크빗으로 바꾸었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그런 표식을 제공해야 하는 것도 삽화가의 몫이다. 물론 화학자들은 연결관계를 바라보며 원소들에 연결된 것과 그 패턴에 바탕을 두면서 원소를 인식하도록 훈련을 받아왔다. 하지만 ‘비표준’의 색깔로 바꾸는 일은 일반적으로 유용하지 않다.


문은 저자 중 한 명인 칼 해리슨이 화학 학술저널의 표지논문에 쓸 삽화를 제작했던 사례도 소개하고 있다. 흔히 저널 출판인은 호평을 받으며 주목받을 만한 논문을 저널의 표지 논문으로 실으려 하는데, 이 때에 편집인은 “당신 논문이 논문심사자 사이에서, 그리고 출판국에서 매우 좋은 평을 받았기에, 당신 논문이 실리는 해당호의 표지에 실을 수 있도록 눈길을 끌만한 작품을 제출해주시길 요청드린다”는 식의 표지용 삽화를 논문 저자들한테 요청하곤 한다. 표지 논문이 된다는 것은 큰 영예이기에, 논문 저자들은 각별한 신경을 써서 표지 논문 제작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다음은, 칼 해리슨이 표지용 삽화를 제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먼저 종이에 삽화의 개념을 구상하는 스케치 작업을 하고, 이어 삽회에 들어갈 독립적인 구성요소들을 먼저 제작하는데, 3차원 입체감을 높이는 작업이 진행된다. 이어 여러 구성요소을 종합해 최종 삽화를 구성하고 이를 다듬는 작업이 이어진다. 이런 표지 논문의 삽화는 과학 내용을 보여주는 시각물이면서 또한 예술성을 돋보이는 시각물로도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00visual50.jpg » 화학 구조 제작 과정. 먼저 화학자는 화학 구조의 얼개를 밑그림으로 그린다(왼쪽). 전체 화학 구조에 들어가는 독립적인 구성요소들을 제작한다(가운데). 그런 다음에 이런 요소들을 종합해 전체 그림의 초안을 만들고, 점차 다듬어 완성한다(오른쪽). 출처/ K. Harrison et al.(2013)

저자들은 화학 구조를 시각화하는 데 쓰이는 매우 많은 소프트웨어 도구들이 개발되어 쓰이면서, 이제 “과학자들이 컴퓨터 시작화 기술을 사용해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하며 화학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며, 또한 과학에 담긴 아름다움을 대중에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시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과학, 시각적 표현의 효과를 높이는 예술, 그리고 더욱 간편한 시각화 도구를 개발하는 소프트웨어 기술이 점점 더 긴밀하게 어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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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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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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