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연구자들의 "청춘 스케치"

연구의 맛과 멋을 배우는 젊은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그리고 사회와 만남에서 얻는 에피소드와 경험, 그리고 생활의 단상을 전합니다.

토리노에서 연구하며 부대끼며 살기

신동화의 “유럽에서 포닥으로 살기 -이탈리아”


[5] 토리노의 사람들

00torino4.jpg » 저희 집 옆에 있는 토리노의 재래시장입니다. 가운데 광장 쪽으로 잡화와 채소, 과일을 파는 노점이 열리고 축산물과 해산물을 파는 상점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저도 관광으로 와서 구경하면 신났겠습니다만, 거의 하지 못하는 이탈리아어로 북적이는 시장에 들어가 원하는 걸 찾아 사오는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진/ 신동화


이가 태어난 뒤 폭풍처럼 지나간 한 달을 뒤로 하고 이제 이탈리아 연구실로 돌아왔습니다. 밀라노 공항에 내리니 문득 모든 것이 낯설고 어찌나 아이가 보고 싶던지 눈물이 왈칵 났습니다("태어난 딸을 보며, ‘가족과 연구, 삶의 균형’을 생각하며"). 대략 스무 시간을 비행기를 탄지라 토리노행 버스를 타고는 죽은 듯이 잠들었는데, 토리노에 도착해 잠이 깨자 조금씩 슬픈 마음이 가셨습니다. 시내 재래시장 쪽에 있는 집 부근에 오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여행 내내 저를 우울하게 만들던 쓸쓸한 기분이 우리 동네에 오자 누그러지는 것이 참 희한했습니다. 익숙함과 안도감이랄까요?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뭔가 위안이 되는 것이 확실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토리노에 대한 저의 첫 인상은 이와는 거리가 먼 조금 울적하고 차가운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덧없는 것인지, 처음 도착했을 적에는 그리 울적한 모습만 보이더니 이제는 가족과 떨어져 돌아오면서도 우리 동네에서 뭔가 모를 안도감으로 위안을 받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가 사는 토리노, 우리 동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여기에서 제가 사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제 가족에도 제가 여기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토리노, 대체 어떤 곳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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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별로 아는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토리노에 오기 전까지 저는 이탈리아의 역사나 문화에 정말 문외한이었습니다. 이탈리아를 보여주는 책 중에 제가 기껏 읽은 것은 <먼나라 이웃나라 이탈리아 편>, <돈 까밀로와 뻬뽀네>(‘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이란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정도였습니다. 토리노에 오기로 결정된 뒤 이탈리아 역사에 관한 책을 읽기로 마음먹고 책을 찾아보았지만, 로마 제국이나 르네상스에 관한 책은 많아도 그밖의 시기에 관한 책은 정말 드물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것이겠고, 저도 별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토리노에 관해서도 아는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제가 토리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이곳에서 동계 올림픽이 개최됐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토리노는 90만 명 정도가 사는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주의 도시입니다. 토리노에서 유래한 것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들도 알 만한 것은 피아트 자동차, 라바차 커피 등입니다. ‘로쉐’(Rocher, 이탈리아어 발음으로 ‘로케르’) 초콜렛으로 유명한 기업인 페레로(Ferrero)는 토리노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알바(Alba)라는 도시에 있습니다. 저도 페레로 로케르가 전부 회사 이름인줄 알았다가, 헤이즐넛이 들어간 금색 포장의 초콜렛의 이름이 로케르라는 걸 여기 와서야 알았습니다. 또 토리노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알프스와 가깝다는 점입니다. 가까운 방향으로는 기차로 1시간 남짓 가면 닿을 수 있습니다. 계획도시인 토리노는 길이 반듯해서 큰 길의 끝에 보이는 알프스의 산들을 시내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00torino1.jpg »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토리노 동쪽에 있는 카푸친 언덕에서 찍은 토리노 시내 모습입니다. 높이 솟은 건물은 토리노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몰레 안토넬리아나’라는 건물입니다. 구름이 끼어 알프스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울적해 보이지 않나요.^^

 

조금은 차가웠던 토리노의 첫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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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혹시 이탈리아의 작가 ‘프리모 레비’를 아시나요? 프리모 레비는 유태인으로 파시즘 치하의 이탈리아에서 저항운동을 하다 투옥되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던 사람입니다. 아우슈비츠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명으로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해 책으로 펴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의 작품이 여럿 번역되어 있는데 <주기율표>, <이것이 인간인가>, <살아남은 자의 아픔>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프리모 레비의 책을 사서 보게 된 것은 그가 제가 있는 ‘폴리테크니코 디 토리노(Politecnico di Torino, 토리노공과대학)’ 출신이라는 점을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화학을 전공한 우수한 학생이었는데, 그 덕분에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가동하려고 했던 합성고무 공장의 실험실에 배치되어 좀 더 나은 음식과 옷가지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뛰어난 화학자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엄청난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탓인지 그의 글은 독특한 매력을 담고 있는데, 직업적인 과학자로서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제게는 참 놀라웠습니다. 좀 곁가지로 새는 것 같지만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는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다카기 진자부로의 <시민과학자로 살다>와 더불어 과학기술자의 글쓰기가 어떠해야 하는지 제게 많은 생각거리를 준 책입니다. 화학자로서, 작가로서 성실했던 그의 면모와, 이탈리아의 현대사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혹시라도 토리노에 오셔서 '포 가(街)'(Via Po)를 따라 걷게 되신다면, 레비의 아버지가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고 그 값을 로그 자로 검산하던 곳이 어디쯤일지 생각하는 재미도 누릴 수 있을 것이구요.

 

아무튼 그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아마도 토리노에 관한 저의 첫 인상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글은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약간은 어둡지만 또 동시에 무척이나 지성적이고 우아합니다. 학교 연구실에 처음 도착한 날 저는 그 책에 나오는 학교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11월에 도착했는데, 수북히 쌓인 낙엽과 학교의 차가운 돌바닥은 책의 분위기와 묘하게 맞아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떠나 낯선 곳에 온 긴장감과 막연한 불안감이 그런 조금은 어두웠던 첫 인상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00torino2.jpg » 알디타의 환송회. 알바니아에서 온 알디타는 올 봄에 학위를 받고 영국 노팅엄대학의 박사후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행사가 있을 때 쓰는 공간이 연구동 4층에 있는데, 왼쪽에서 후스발(Fussball, 탁상 축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연구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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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막상 연구실에 와 보니 여기는 지적이고 우울했던 첫 인상과 거리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찌나 말들이 많고 떠들썩하던지요. 정말로 거짓말 안 보태고 저 같은 사람은 할 말 있으면 손들고 말해야 기회를 얻을까 말까 합니다. 우리 연구실은 공식적으로 교수가 여섯 명, 박사후연구원이 여섯 명, 학위과정(석사·박사) 학생이 여섯 명, 연구원(테크니컬 스태프)이 여섯 명 있는 꽤 큰 연구실입니다. 제가 속한 반도체 설계 자동화 그룹과 바이오인포매틱스 그룹이 반반 정도입니다.

 

국적도 다양한데 지금은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이집트, 알바니아, 한국 사람이 있고 브라질 사람도 있습니다. 이탈리아어는 라틴계 언어를 쓰는 나라 사람들로서는 배우기가 굉장히 쉽다는데, 보통 오자마자 현지 텔레비전 방송을 그냥 볼 수 있고, 두세 달 정도 지나면 읽고 쓰는 데에도 거의 문제가 없어서 라틴 아메리카 쪽에서 오는 유학생들이 많다고 합니다. 또 기본적으로 학비가 없거나 매우 싸기 때문에 학비가 부담이 되는 중동이나 중국, 인도 학생도 많이 있습니다. 폴리테크니코 디 토리노는 장기적으로 대학원생을 확보하려고 중국 대학들과 교류에도 열심인데 그 결과로 현재 2000여 명 정도의 중국 학생이 토리노에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한국인은 저 하나입니다. 물론 이탈리아 학생들이 가장 많습니다. 흥미롭다고 생각한 것은 저의 연구실에는 남부, 특히 시칠리아 출신 학생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나라도, 나이도, 인생사도, 각기 다른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사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꼭 우리나라 어디에선가 들었던 것만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로마 출신인 마시모는 로마에 있는 약혼자가 보고 싶어 로마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남서부 바리(Bari) 출신인 알레산드로는 부모님이 먹을 걸 정기적으로 보내주는데 뭔가 도착하면 다음날에는 어김없이 연구실에 싸들고 옵니다. 인도 사람인 산디프와 파키스탄 사람인 하룬은 크리켓 대회에서 자기 나라를 응원하며 핏대를 세우기도 하고, 이집트에서 온 가사르는 결혼 비용 때문에 골치가 아프답니다. 이집트에선 남자쪽에서 결혼 비용이 아주 많이 든다고 하는군요. 시칠리아에서 온 마르코와 가스파라는 고향으로 돌아가 벤처 회사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연구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알베르토(50대)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연구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얼마 전부터 지팡이를 짚고 연구실에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딸이 태어났다고 하자 연구실은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서로 자기 이름을 따라 지으라며 장난을 치더군요.^^ 이탈리아 이름에서 여자 이름은 보통 ‘아[a]’ 로 끝나고 남자 이름은 ‘오[o]’로 끝나는데, 남자 혹은 여자 이름으로만 쓰이는 이름도 많습니다. 제 옆에 앉는 박사과정 학생인 에도아르도(남자만 쓰는 이름)가 자기 이름을 따서 ‘에도아르다(Edoarda)’라고 지으라며, 에도아르다란 이름은 지구상에 최초이자 유일한 이름으로 자신이 특별히 제 딸 이름으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약간 어리벙벙해져서 나중에 로마자 이름을 따로 짓게 되면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최근 저와 친하게 지내던 학생들이 다른 나라나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되어 저도 좀 싱숭생숭합니다. 알디타는 영국 노팅엄대학의 박사후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에도아르도와 산디프는 각각 맨체스터와 로잔에 있는 학교에 인턴 자리를 구했습니다. 폴리테크니코 디 토리노는 박사학위 과정 동안에 의무적으로 6개월을 다른 나라에 있는 학교에 방문연구원으로 머물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의 생활비는 국립대인 폴리테크니코가 지원하니, 사실상 이탈리아 정부가 지원하는 셈입니다. 자비로 어학연수를 가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원래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월 1000 유로 정도의 생활비가 지급되므로 정부 입장에서 특별히 더 큰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영국, 스위스이나 북유럽 국가들처럼 물가가 비싼 나라들에서 인턴 자리를 구한 학생들은 고생을 많이 하고 온다고 하는데, 우리 연구실의 둘도 걱정이 되는가 봅니다.

 

자리에 들기 전에 아내가 보내준 딸 사진을 보고 동영상을 보며 한참 시간을 보냅니다. 아이를 안았을 때의 온기, 냄새 이런 것들을 되새기면 정말로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곳의 연구실 동료들, 동네 이웃들 덕분에 하루하루를 지냅니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사이언스온에 쓴 제 글에 토리노에 수년째 살고 계시는 분이 답글을 다시고, 제게 메일을 주셨습니다. 글을 쓰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갔을 텐데, 여러모로 사이언스온에 글을 쓰게 된 것이 제게 운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다음 번에는 연구실 동료들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이탈리아의 박사과정 학생들, 연구자들은 어떻게 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해드릴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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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화 토리노공대 박사후연구원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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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화 이탈리아 토리노공대 박사후연구원, 컴퓨터공학
이탈리아 토리노공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다. 공인된 분류를 따르자면 설계자동화 분야를 연구하고 있고, 구체적인 전공은 내장형 컴퓨팅 시스템의 저전력 설계 기법인데 사실은 납땜부터 코딩까지 가리지 않고 다했다. 취미랑 전공이 비슷해서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메일 : donghwa.shin@polito.it      
블로그 : http://mimosa.snu.ac.kr/~zira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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