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내 노벨상을 한국정부에 팔면 어떻소?"

노벨상 수상자 시드니 브레너 박사와 함께한 닷새간 동행기


"유쾌한 브레너 할아버지, 농담도 잘 하시네!"

00Sbrenner33.jpg » 강연 중인 시드니 브레너 박사. 사진/ 서울대 암세포생물학연구실 제공



5월 12일 일요일 오후, 저는 인천공항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피켓을 들고 한 외국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피켓이 적힌 이름은 ‘Dr. Sydney Brenner’. 시드니 브레너 박사는 2002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이자 분자생물학의 살아 있는 전설입니다. 제 가슴이 두근거린 건 단순히 그의 화려한 이력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그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가 걱정되었습니다. 관건은 그가 휠체어에 앉아서 나타나느냐 걸어서 나오느냐였습니다.


대학원에서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작은 벌레를 연구하며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저는, 우연한 계기로 시드니 브레너 박사의 한국 방문을 보조하게 됐습니다. 한국 생화학분자생물학회 학술위원이신 이현숙 교수님께서 2001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팀 헌트(Tim Hunt) 박사를 포함해 여러 해외 명사들을 초빙하셨는데, 제가 이들 중 한 분인 시드니 브레너 박사의 수행을 같은 연구실의 서범석 형과 함께 맡게 된 것입니다.


처음엔 노벨상 수상자와 함께 다니는 상상을 하며 한껏 기대에 부풀었지만, 막상 입국 날짜가 다가오자 부담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여든일곱의 고령인 시드니가 얼마 전 폐렴으로 고생하였고, 지금도 건강 상태가 썩 좋은 편이 아니라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드니는 한국에서 산소통과 휠체어까지 준비해주기를 직접 요청하였고, 저희 쪽에서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10 킬로그램이 넘게 나가는 응급장비까지 준비해두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포부를 키우는 시간을 가질 것이라 기대했는데, 오히려 많은 짐과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잔뜩 무거워진 채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가 내 4대손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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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를 태운 비행기가 도착한 지 30분쯤 뒤, 드디어 사진에서만 보던 그가 휠체어를 탄 채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가끔 힘이 부치실 때 휠체어를 타실 거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거동이 더 힘드셔서 휠체어를 계속 타셔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제외하곤 시드니의 건강 상태는 꽤 좋아 보였습니다. 저희를 만나자마자 먼저 또렷한 목소리로 각자 소개를 해보라고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00Sbrenner.jpg » 공항에서 시드니 브레너와 함께 찍은 ‘셀카’.

시드니 브레너는 제가 연구하는 예쁜꼬마선충을 발굴한 주인공이자, 저희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꼬마선충 연구 가문의 시조이자 저에겐 고조할아버지가 되는 셈이죠. 저희가 수행을 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런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시드니에게 저희는 예쁜꼬마선충을 연구하는 학생들이라고 소개하니 매우 반가워했습니다. “시드니 브레너 박사님이 제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의 지도교수”라고 말씀드리니 “네가 내 에프포(F4, 4대손이라는 뜻의 유전학 용어)구나! 최근에 에프식스(F6, 6대손)도 본 적 있다네! 허허허” 하면서 농담을 건네셨습니다. 혹시 깐깐한 분이 아니실까 긴장했는데, 유쾌하게 농담을 건네시는 모습에서 그 긴장감이 녹아내렸습니다.


계속 유쾌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드니의 건강 상태가 꽤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찬 장소인 삼청각에 거의 도착할 때 쯤, 범석 형이 시드니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건강의 비결이 뭔가요?” 시드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좋은 유전자, 좋은 의사, 그리고 싱글몰트 위스키(Good gene, Good doctor, and single molt whiskey)!”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시드니 브레너를 떠올린다면 끊임없이 농담을 던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내 노벨상을 파는 건 어떻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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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머무는 동안 시드니 브레너 박사는 모두 네 차례의 강연을 했습니다. 5월 13일엔 “2013 서울대 노벨 강연”을, 14일엔 “서울대 학부생들과의 만남”과 생화학분자생물학회 기조강연을, 15일엔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대중강연을 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많은 학생과 대중들이 자리를 메웠고, 발표자료도 없이 오직 구술로만 진행되는 시드니 브레너 박사의 강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노벨상에 대한 한국의 국가적 염원은 상당한 듯합니다. 이와 관련해 저희 연구실 책꽂이에는 아주 재미난 보고서가 한 권 꽂혀있습니다. <노벨과학상 분석 및 접근전략 연구>(2008)이라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정책연구 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는 제목부터 여러모로 흥미를 끕니다. 도대체 왜 정부 부처가 노벨과학상을 수상할 수 있는 전략을 연구할까요? 또 노벨과학상을 받을 수 있는 전략 같은 게 정말로 있을까요? 그리고 정부가 이런 연구를 하는 나라가 한국 외에도 또 있을까요?


전후 잿더미가 된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고 서울올림픽을 열더니 이제 지20(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하고, 월드컵 4강 신화를 쓰고, 평창동계올림픽을 개최하고, 나로호를 쏘아 올리고, 심지어 이제 싸이가 유튜브와 빌보드차트까지 휘젓고 있습니다. 왠지 이쯤 되면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하나 배출해야 할 법해 보입니다. 하지만 축구로, 야구로 심지어 이제 피겨 스케이팅으로도 종종 이기는 일본을 노벨과학상으로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한 가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시드니 브레너 박사처럼 이미 그 상을 받은 사람들에게 노하우를 전수받는 것입니다. 혹시 노벨상 수상의 비결 같은 것이 있다면, 잘 분석해서 적용해 좋은 ‘전략’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와 합작으로 쏘아 올린 나로호가 자체 발사체제 구축에 큰 도움을 준 것처럼 말이죠. 이런 이유 때문인지, 학계나 정부 쪽에서 노벨상 수상자들을 한국에 초빙해 강연을 열거나 공동연구를 지원하는 사례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2013 서울대 노벨 강연”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뒤에 범석 형이 시드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초청하신 분들이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노하우를 알려주시길 기대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돌아오는 시드니의 대답이 ‘대박’이었습니다.


“그럼 내 노벨상을 한국 정부에 파는 건 어떻겠소?”


농담이었지만, 그저 농담만으로 들리지 않는 대답이었습니다.



노벨상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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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서울대 노벨 강연”과 “서울대 학부생들과의 만남”은 2001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팀 헌트 박사님도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특히 팀 박사님은 2013 서울대 노벨 강연에서 ‘노벨상을 받는 방법(How to win a Nobel prize)’라는 아주 재미난 제목의 강연을 진행하셨습니다. 노벨과학상 수상 전략을 연구하는 이들이라면 귀가 솔깃할 만한 제목의 강연이 아닐까요.


00brenner2.jpg » 2001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팀 헌트 박사의 발표 슬라이드. 제목이 ‘노벨상을 받는 방법(How to win a Nobel prize)’이다. 하지만 만약 이들이 제목에 혹해 강연을 들었다면 몹시 실망했을 것입니다. 팀은 강연 서두에서 노벨상을 받는 비결 대신 노벨상을 받은 뒤 아내와 나눈 대화를 소개했는데, 그건 바로 “팀, 당신이 노벨상을 받았다면 누구든 받을 수 있을 거예요!(If you can, anybody can!)”였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팀은 대부분의 강연을 자신이 발견한 싸이클린(cyclin)이라는 세포주기 조절인자의 연구 과정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습니다. 그의 설명 안에서 노벨상으로 가는 어떤 접근 전략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거기에는 오로지 과학의 논리, 호기심의 논리가 담겨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연구자들이 피해야 할 세 가지 항목으로 주도권(initiative), 네트워크(network), 그리고 전략(strategy)을 꼽았습니다. 대신 그가 제시하는 덕목은 바로 ‘정말로 중요한 질문을 풀라(Solve really important question)’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질문을 풀라. 팀의 강연을 휠체어에 앉아 지켜보던 시드니 브레너 박사는 현존하는 과학자 중 누구보다 그 가치를 몸소 구현한 과학자가 아닐까 합니다. 그는 분자생물학의 태동기에 디엔에이(DNA)의 염기서열이 세 개씩 순서대로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삼중 코드(triplet code)’를 밝히는 데 핵심적 기여를 했습니다. 대부분 분자생물학자들이 바이러스와 세균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다세포생물인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생명체로 새로운 모델 연구를 시작해 신경과 발생 연구의 거대한 장을 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게놈 시대를 맞아 척추동물의 유전체를 분석하고 진화의 비밀을 풀고자 했습니다.


팀의 강연이 끝나고 오후에 진행된 시드니의 2013 서울대 노벨 강연의 제목은 ‘인간 생물학과 의학(Human Biology and Medicine)’이었습니다. 그는 여든일곱이라는 나이에도 여전히 거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연구를 할 때가 되었다는 야심찬 비전을 드러냈습니다. 저는 DNA에서 시작해 작은 선충을 거쳐 인간에 이르는 질문의 거대한 여정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거대한 질문에 삶을 바쳐 응답해온 시드니 브레너에게 ‘어떻게 노벨상을 받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은 ‘내 노벨상을 팔겠소’라는 농담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는 협소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질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질문을 좇았지, 노벨상을 좇은 게 아니었기에 노벨상을 위한 전략 따윈 안중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내 노벨상을 팔겠소’라는 그의 농담이 우리에게 더 큰 질문을 던지는 듯합니다. “한국은 왜 그토록 노벨상에 목을 매는가?”



개구리 조립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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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수요일 아침, 코엑스에서 시드니 브레너 박사의 대중강연이 열렸습니다. 꽤 큰 홀에 중고등학생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서울뿐만 아니라 경기, 인천에서 온 학생도 있었습니다. 아마 대부분 처음 노벨상 수상자를 봤을 텐데, 반짝이는 눈으로 살아있는 전설의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시드니 박사님은 또다시 농담으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12년 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저는 왜 과학자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와 자리를 함께하던 물리학자가 ‘어릴 적 라디오를 분해했다가 조립하는 재미로 물리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대답할 차례가 오자 전 ‘어릴 적 개구리를 분해하는 걸 좋아했는데 조립할 수가 없어서 생물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고 대답했지요.”


생물학이 물리학보다 더 고차원적인 대상인 ‘생명’을 연구한다는 자부심을 재치 있게 표현한 것이지요. 또 이런 비슷한 일화도 들려주었습니다. “일본에서 한 스님이 강연했는데 산과 들에도 다 생명이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반론을 했지요. ‘산은 DNA가 없으므로 생명이 아니다!’ 생명이란 정보를 갖고 있고 복제할 수 있는 존재지요.”

00brenne3.jpg » 대중강연에 참석한 청소년들과 시드니 브레너 박사

강연이 끝나고 많은 학생들이 시드니와 함께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아갔습니다. 지친 시드니 브레너가 이제 돌아가 쉬고 싶다고 하셨을 때, 한 여학생이 다가왔습니다. 노트를 들고 쭈뼛거리는 모양새를 봐서 사인을 받고 싶은 모양이었습니다. 시드니 선생님께서 더 이상 사인을 못 해주신다는 얘기를 듣자 그 학생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때 제가 시드니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사인을 해주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사인을 받아든 그 학생은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오 마이 갓!’을 외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사실 11년 전인 2002년 여름, 저도 대중강연에 참여한 청소년들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 고향인 포항에서 전국과학축전이라는 행사가 열렸고, 저는 매일 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서 열리는 모든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빠짐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연사 중 한 명이었던 존 설스턴 경은 그 해 시드니 브레너 박사와 함께 노벨상을 수상했고, 그가 연구했던 예쁜꼬마선충은 제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를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어보았다는 경험은 어린 저에게 큰 자긍심이었고, 그 일로 더 단단하게 과학자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때 던졌던 질문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날 정도입니다. 강연이 끝난 뒤 질문을 하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제 모습이, 사인을 받으려 발을 동동 굴리는 여학생의 모습과 겹쳐진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인을 받고 기뻐하며 뛰어가는 학생의 뒷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흐뭇한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잃어버린 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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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설스톤을 만나 생물학자의 꿈을 꾼 지 11년이 지난 지금, 저는 존 설스턴 경의 지도교수이자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시드니 브레너의 한국 방문을 보조하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11년 전의 만남은 한국의 한 꼬마 학생과 세계적인 과학자의 만남이었다면, 이번 만남은 한 분야의 창시자와 그 지도학생의 지도학생의 지도학생의 지도학생으로의 만남이라는, 이를테면 시조와 직계 자손의 만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뿌듯함이나 신기함보다는 상실감이 더 강하게 듭니다. 11년 전의 제가 갖고 있었던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시드니 브레너와 함께 있으면서 제가 배운 것은 그가 해답을 얻는 방식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태도였습니다. 그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좋은 해답을 구했기 때문이 아니라 중요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생명 현상의 본질인 유전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물었고, 그 유전자들이 어떻게 생명체를 빚어내는지 물었으며, 생명의 다양성은 어떻게 진화했는지 물었고, 이제 가장 복잡한 생명체인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11년 전의 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이고, 시간이란 무엇이며, 물질은 무엇으로 구성되고, 자연의 다양성과 통일성은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대성 이론 책에 매달려 끙끙대고, 유전의 분자적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짜릿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 삶을 지배하던 그런 중요한 질문들은 이제는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은 논문을 빨리 낼 수 있을지 고민하며, 무슨 직업을 가질지 고민합니다. 가끔 생명이란 무엇인가 같은 고민을 다시 하지만,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임을 알고 금방 그 질문에서 나가떨어져 버립니다. 11년 동안 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휠체어 탄 천재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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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월요일 아침, 호텔에서 시드니 브레너 박사를 모시고 서울대 문화관의 강당에 도착한 저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휠체어를 탄 시드니 앞에는 연단까지 내려가는 너무 긴 계단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간만 움직여도 혈중 산소 농도가 떨어져 산소 튜브를 끼어야 하시는 분인데, 그 많은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야 하는 방법 외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만약 시드니 브레너가 전혀 걸을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노벨상을 탄 천재 과학자는 그저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00brenner4.jpg » 휠체어 탄 시드니 브레너 박사와 무대로 가는 계단. 거동이 불편한 시드니는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계단을 걸어 내려가야 했다.

이 사건은 저에게 너무 충격적인 장면으로 남아 며칠 간 제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해프닝이라기보다는 제가 놓여 있는 현실의 명징한 ‘표징’처럼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휠체어, 계단, 밝은 무대로 구성된 그 이미지는 제 머릿속에서 재구성됐습니다. 밝은 무대로 이어진 계단을 앞에서 무기력하게 휠체어에 앉아 있는 우리 세대의 모습으로 말이죠.


외형적으로 보기엔 예전보다 연구 환경도 훨씬 나아졌고, 연구비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무대는 환희 비춰져 있고, 무대로 가는 계단엔 레드 카핏이 깔린 듯합니다. 그러나 제 주위 젊은 과학도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합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연구만으로도 힘든데, 어떤 사람은 인권을 침해당하며 시름하고 또 어떤 사람은 너무 센 노동 강도에 삶이 피폐해지기도 합니다. 서울대 <대학신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51%’의 대학원학생이 스스로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험난한 학위 과정 끝에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면 그래도 버틸 만할 텐데, 현실은 녹록지 않은 듯합니다. 언론에서는 ‘서울대 박사 4명 중 1명은 실업자’라는 기사가 나오고, 해외로 박사 후 연구원을 하러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은 점점 쌓여만 가고 있습니다. 20대 중후반에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하니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결혼도 어려운데 어찌 노벨상을 꿈꿀 수 있을까요. 먹고 살 걱정에 눈앞이 캄캄한데 어떻게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오래도록 붙들고 있을까요.


혹자는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한국이 노벨상이라는 큰 꿈을 꾸게 된 것도 다 가난에서 벗어난 덕분이 아닐까요. 거꾸로 구제금융 시절 이후에 먹고 살기가 더 팍팍해지면서 이공계 기피 현상이나 의대 쏠림 현상은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는 이런 제 얘기가 엄살이나 징징거리는 소리로 들릴지 모릅니다.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고 열심히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노벨상 수상자인 팀 헌트 박사가 서울대 학부생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00brenner5.jpg » 시드니 브레너 박사와 팀 헌트 박사가 함께한 학부생과의 대화(Nobel Laureates with SNU students). 학부생들은 노벨상과 과학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던졌고, 두 노벨상 수상자들은 깊이 있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팀은 ‘노벨상 수상자들의 공통점이 있나요?’라는 질문을 받자 ‘큰 행운’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의 “재밌는 발견은 실수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행운이나 실수는 의지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주목받지 않던 연구나 과학자가 중요한 발전을 일궈내기도 합니다. 박사학위도 없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다나카 고이치가 2002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것처럼 말이죠.


덧붙여 팀은 “정부, 장관, 총리는 집중해서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과학은 그런 식으로 되는 게 아니다(It’s not the way in science)”라고 얘기했습니다. 노벨상급의 스타 과학자를 육성하는 데 많은 역량을 투입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귀 기울여야할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간디와 ‘강남스타일’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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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를 꺼내는 건 단지 ‘질문을 잃어버리게 된 11년’을 변명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대개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는 개인적인 요소와 구조적인 요소를 모두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문제를 ‘개인 탓’ 혹은 ‘구조 탓’으로 전적으로 돌리는 것은 진실을 오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시드니 브레너와 함께 보낸 5일은 문제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날카롭게 뜯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 저는 구조적 문제를 푸는 데에 ‘강남스타일’에서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남스타일 열풍이 놀라웠던 건 누구도 싸이와 강남스타일이 월드스타가 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수많은 아이돌과 한류스타들이 세계 무대를 두드렸지만, 유튜브와 빌보드를 점령한 건 놀랍게도(?) 싸이였습니다.


사실 싸이가 유투브나 빌보드에 진출하기 위해 강남스타일을 만든 것은 절대 아니었을 겁니다. 본인 스스로 밝혔듯이 지금껏 해온 자기 음악을 했을 뿐인데 꿈만 같은 일들이 벌어진 것이겠죠. 누군가 싸이에게 세계 무대에 진입하기 위해 다른 한류스타들의 문법을 따르라고 지시했다면 오늘의 싸이와 강남스타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의 음악을 묵묵하고 든든히 응원해준 팬들과 소속사가 있어 강남스타일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드니 브레너와 그의 노벨상 수상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새로운 모델 생명체를 발굴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시드니 브레너가 예쁜꼬마선충 연구에 착수한 것은 1960년대 초인데, 당시엔 모두 바이러스와 세균을 갖고 아주 기본적인 분자생물학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이러스나 세균보다 훨씬 복잡한 예쁜꼬마선충을 연구한 그가 첫 번째 논문을 발표하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노벨상은 그의 몫이기도 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를 ‘질문의 크기’만을 보고 지원해준 연구소의 몫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과학은 창의적 활동이자 창조적 활동입니다. 이제껏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거나 만들지 못한 것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죠. 창의성, 혹은 창조적 작업이라는 것은 어떤 지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것은 ‘우리 자신들’이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각자 고유한 유전자를 물려받고, 또 각자 고유한 경험을 쌓으면서 세상에 둘도 없는 독창적인 존재가 됩니다.


팀 헌트 박사는 자기가 나온 케임브리지대에서 왜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배출됐느냐는 질문에 ‘이질성(heterogeneity)’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과학자 저마다의 색깔이 달랐단 말이죠. 싸이는 싸이의 노래를, 조용필은 조용필의 노래를 하다 보면 어떤 때는 조용필의 시대가, 또 어느 날에는 싸이의 시대가 오는 것처럼, 한국이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는 시대가 오려면 제각기 과학을 마음껏 노래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한편으론 개인의 뜨거운 열정과 부단한 노력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좌우명은 마하트마 간디의 ‘내일 죽을 것처럼 살며, 영원히 살 것처럼 공부하라’입니다. 저는 이 말을 시드니 브레너에게서 보았습니다. 여든일곱이라는 고령과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거동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찾아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 것을 보며 ‘내일 죽을 것처럼 살며’를 보았습니다. (시드니 브레너는 한국을 떠나 런던으로 갔다가, 잠시 포르투갈에 들렀다, 캐나다에 있는 학회에 참석한 후 싱가포르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튜브를 통해 종종 산소를 공급받아야 하는데도, 이동 중에 연구원과 앞으로 진행해야 할 연구들에 관해 논의하는 모습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공부하라’를 보았습니다. 시드니를 보며 저에게 더 많은 ‘간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이 녹록지 않더라도 영원히 살 것처럼 학문을 사랑하며, 연구에 매진할 때는 내일 죽을 것처럼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태도 말이죠.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배출되려면 과학 꿈나무와 그 꿈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랄 토양이 모두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디가 말했듯 ‘영원히 살 것처럼 연구하는’ 열정적인 과학자들이 늘어야 하고, 그 과학자들이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창조적인 연구를 포기하지 않도록 기반을 제공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는 사회. “젊은 청년들의 가슴엔 더 많은 간디가, 우리 사회에는 더 많은 강남스타일이”, 이것이 제가 노벨상 수상자와 함께한 5일을 통해 내린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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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한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유전과 발생 연구실, 박사과정
예쁜꼬마선충이라는 모델 생명체로 행동의 유전적 기반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성공하는 과학자보다는 성찰하는 과학자를 지향합니다. 글을 읽고, 쓰고, 나누는 데서 큰 기쁨을 얻습니다. 말하는 연구자, 글쓰는 과학자를 꿈꿉니다.
이메일 : phman11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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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림] 사이언스온이 미래&과학으로 바뀝니다[알림] 사이언스온이 미래&과학으로 바뀝니다

    뉴스사이언스온 | 2017. 12. 11

    미래/과학/기술/환경 뉴스와 비평, 연재물 서비스사이언스온 옛 글들은 지금처럼 접근 가능합니다 독자님들께안녕하세요. 그동안 작은 도전이었던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의 필자들을 격려해주시고 또 웹진을 사랑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

  • “언어사용 패턴은, 몸의 스트레스 보여주는 지표”“언어사용 패턴은, 몸의 스트레스 보여주는 지표”

    뉴스오철우 | 2017. 11. 07

    특정 언어사용패턴과 스트레스 관련 유전자발현 사이에 ‘상관성’“무의식적 언어패턴이 의식적 자가보고보다 측정정확도 더 높아” 일상언어 사용의 패턴이 말하는 이 자신도 잘 모르는 몸의 스트레스 반응을 알려주는 지표로 사용될 수 있다는 연구결...

  • 정교해진 유전자가위…‘염기’ 하나만 바꾼다정교해진 유전자가위…‘염기’ 하나만 바꾼다

    뉴스오철우 | 2017. 11. 07

    ※ 이 글은 한겨레 11월6치 '미래&과학' 섹션 지면에 실렸습니다. 지면 편집 과정에서 분량을 줄이기 이전 원고를 사이언스온에 올립니다. 편집 과정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습니다.정교해진 유전자가위염기 하나만 바꿔치기[미래&과학] 주목받는...

  • ‘노화는 불가피하다 -논리적으로, 수학적으로’‘노화는 불가피하다 -논리적으로, 수학적으로’

    뉴스오철우 | 2017. 11. 03

    수학적 모형 분석 논문 ‘눈길’세포간 경쟁과 선택, 노화와 암의 ‘딜레마’ 같은 상호관계 다뤄‘노화는 불가피하다. 논리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수학적으로도 노화를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노화를 일정 정도 늦출 순 있어도 멈출 순 없다는 ...

  • 염기 하나만 바꾸는 단일염기 수정기법의 '확장'염기 하나만 바꾸는 단일염기 수정기법의 '확장'

    뉴스오철우 | 2017. 10. 26

    시토신-구아닌 쌍을 티민-아데닌 쌍으로 ‘점 수정’ 이어아데닌-티민 쌍을 구아닌-시토닌 쌍으로 수정기법 개발하버드대학 리우 교수와 MIT 펑 장 교수 각각 성과 발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법의 기본 원리를 이용하되 디엔에이(DNA) 두 가닥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