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현장 연구자들'..세대의 벽 넘는 부러운 연구문화
정민기의 "유럽에서 포닥으로 살기 -프랑스"
[2] 예순, 일흔의 현장 연구자들
» 사진 1. 지난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한창 유행하던 ‘남들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 실제 나의 모습’ 비교.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기’ 편. 사진/L. Bernardi 출처http://lisagoestoparis.tumblr.com/image/17656301723
내가 일하던 파리11대학은 (이름이 무색하게도) 파리 시 외곽으로 빠져나와 남쪽으로 고속전철(RER)을 타고서도 삼십 분은 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그래도 시내만 빠져 나오면 전철 내부도, 바깥 풍경도 한결 여유로워진다. 파리11대학이 있는 작은 마을 오르세(Orsay)까지 이어지는 길에서 차창 밖으로 마주하는 풍경은 전형적인 유럽의 한적하고도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연속이다. 자리에 앉아 바깥 경치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조용해진 다른 승객들의 동태도 슬슬 궁금해진다. 오르세 주변으로 여러 이공계열 대학과 연구소가 모여 단지를 이루다 보니, 승객도 대부분 학생이나 교수, 아니면 연구원이다. 자연스레 통학 열차를 탄 기분이다.
기차 안 풍경, 양자역학 푸는 할아버지
한번은 마주 앉은 할아버지가 오래된 가죽 서류가방 위로 종이뭉치를 꺼내 들고 열심히 뭔가를 쓰시기에, 궁금한 마음에 살짝 내용을 엿봤다. 수식이 가득하다. 그래도 눈에 익은 느낌이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아, 저건 양자역학 문제를 풀 때 사용하는 이차섭동이론(perturbation theory)인데. 연구 문제를 푸는 걸까, 아니면 강의 준비를 하는 걸까?
» 사진 2. 오르세 연구소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여러 마을 중 하나인 빌봉-쉬흐-이벳(Villebon-sur-Yvette)의 어느 집. 출처http://www.villebon-sur-yvette.fr 관심 어린 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할아버지는 여전히 수식을 전개하는 일에 몰두해 있다. 가방이 퍽 낡아 보이는 게 젊었을 적부터 쓰시던 건가 보다. 고개를 돌려 건너편을 보니, 백발을 동여맨 할머니 한 분이 역시 종이 위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계신다. 분자 식들이 많이 보이는 게, 이번엔 화학 논문이다. 몇몇 문장들에 빨간 줄이 그어지고 덧글이 달린 걸 보면 논문을 교정하는 중인가 보다. 화학 논문을 읽는 대신 뜨개질을 하고 계셨더라면 더 눈에 익었을 법하다. 이분들, 지난 수십 년 간 저 모습으로 출근 열차에서 하루의 과학을 시작했겠지.
둘러보면, 필기 정리하는 학생, 논문 읽는 연구원, 강의 자료를 살피는 교수 등, 저마다 과학에 열중이다. 한 손에 잡히는 문고판 소설을 읽는 이들도 적잖이 볼 수 있다. (나로선 이름만 들어본) 고전 작가들이 많다. 빅토르 위고, 샤를 보들레르, 기 드 모파상 등등. 동네 서점마다 고전과 문학 작품이 맨 앞 진열대에 놓여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덜커덩거리는 열차 바퀴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젊은이와 어르신 구별 없이 각자의 과학과 문학 세계에 빠진사람들, 그리고 차창 밖 전원 풍경 등을 마주하노라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으로 들어온 것 같은 감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출근길 자투리 시간에 벌써 연구에 빠진 어르신들의 모습은 연구 현장으로 향하는 내 마음가짐을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하곤 했다. 물론, 당장에 두리번거리길 멈추고, 가방 속 논문을 꺼내 드는 거로부터. 그러고 보니, 하루 중 논문이 가장 잘 읽히는 시공간이기도 했다.
연구책임 벗어나 신난, 알룰 박사 할아버지
내가 일하던 연구실 최연장자는 나이가 일흔에 가까운 알룰(Alloul) 박사다. 고온초전도 연구 분야에서 손꼽히는 물리학자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사무실에 날마다 출근해서 데이터를 살피고, 논문을 쓰고, 토론에 참여한다. 은퇴 후에 연구실 책임자로서 행정 부담에서 벗어나 좋다면서 신이 난 표정이다. 이제 연구실 운영 책임은 자신의 제자이기도 했던 오십대 중진 교수인 멘델(Mendels) 박사가 맡고 있고, 다른 젊은 교수 둘과 연구원 한 명이 함께 연구실을 꾸려가고 있다.
은퇴 연구원이 자신의 사무실을 유지하기 위해선 연구실 다른 구성원들의 동의가 있어야 한단다. 알룰 박사의 풍부한 연구 경험은 여전히 큰 자산이기에 누구라도 그가 연구실에 남아줬으면 하고 바란다. (여기에 더해 원만한 인간 관계도 역할을 한다고 들었다.) 연금 외에 따로 보수를 받는 게 아니라서 연구실로서 경제적 부담도 없다.
연구실에는 위에서 말한 전임 연구진 외에도 나 같은 박사후연구원 셋과 박사과정 학생 셋이 더 있었다. 우리끼리도 많이 토론하지만, 실험하다 모르는 게 생기면 젊은 교수나 연구원을 찾아가 상의한다. 대부분 여기서 문제가 해결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연구실 책임자인 중진 교수를 찾아간다. 아주 드물게, 그마저도 답을 모른다면, 마지막으로 알룰 박사의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
» 사진 3. 오르세 ‘새로운 물질상태’ 연구팀. 왼쪽에서 세 번째가 사십여 년 전 연구실을 시작한 알룰 박사. 사진/J. Quilliam, 출처http://hebergement.u-psud.fr
“앙리(Henri; 알룰 박사의 이름), 질문 있어요”는 꼭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매일 얼굴을 맞대는 점심시간뿐 아니라,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치더라도 부담 없이 던지는 말이다. 행여 (사실은 자주) 대학원생이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지더라도 진지하게 받아주고, 긴 대화를 통해, 마침내는 그 학생이 말이 되는 질문을 던지도록 이끌어 주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 인내와 존중심에 감탄하게 된다. 당신 젊었을 적엔 매서운 부분이 없잖아 있었노라 고백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친절한, 뿐만 아니라 만물박사인, 할아버지다.
연구소에선 가끔 백발의 할아버지가 사람 키보다 큰 액체 질소 통을 낑낑거리며 밀고 가는 모습을 본다. 바로 옆 연구실 할머니 연구원도 액체 헬륨 통을 끌고 왔다갔다 한다. 우리나라에선 주로 석사과정 학생이 도맡는 일이다. 선반 기계 작업을 하는 분도 계시고, 직접 프로그램을 짜서 복잡한 계산을 하는 분도 계신다. 은퇴 뒤에 연구 현장에 더 가까이 다가온다는 느낌이다.
연구실 책임자는 한국 교수와 마찬가지로 연구 외적인 일로 굉장히 바쁘다. 여기서도 나이 오십이 넘어가면서 직접 실험할 시간을 내기란 어렵다. 그렇더라도 멘델 교수는 날마다 실험실에 들르길 잊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실험실의 모든 장비와 프로그램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이삼십 년 된 장비가 고장이라도 나면, 제일 잘 고칠 수 있는 사람이 멘델 교수다. 어쩌다 강의나 회의가 없는 날엔 들뜬 모습으로 실험실에 들어와서 ‘나한테 뭐 시킬 실험 없어?’라며 적극적이다. (실제로도 실험을 부탁하면 굉장히 좋아한다.) 실험실 탁자 위엔 멘델 교수가 가느다란 전선을 납땜질 할 때 쓰곤 하는 돋보기가 놓여 있다.
20대부터 60대까지 '한 집에 모여 사는 3대'
나이가 들어도 실험에 대한 실질적인 감을 유지하는 데에는 프랑스 (또는 내가 속했던 연구소들) 특유의 제도와 현실, 그리고 전통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일단 학위과정으로 학생이 들어오면 전임 연구진이 직접 실험을 가르친다. 학생 수가 워낙 적어서 가능하기도 하다. 여러 박사급 연구원이 한 팀을 이루고 있어서 연구비 수주 같은 행정 부담을 나눌 수 있다. 주로 연구실 중진이 책임을 떠맡아 주니까, 젊은 연구진들이 사십 대를 훌쩍 넘어서도 실험실에 머무를 수 있다. 이들이 전임이 될 때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이니까, 학위 기간 합쳐서 이십 년은 자기 손으로 직접 실험을 하는 셈이다.
젊은 연구진은 이 기간에 (연구실 책임자가 되기 전) 실험 장비와 프로그램 개선을 도맡는다. 한국에선 주로 박사과정 학생들이 맡는 일들이다. 여기선 오랜 기간을 두고 한두 사람이 장비를 관리하다 보니, 운영에서 성숙도가 높고, 이런저런 문제가 생겨도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연구실에 이렇게 이십대부터 육십대까지 세대 간에 끊김이 없다. 3대가 한 집에 사는 모양새랄까. 그렇더라도 어떤 상하 관계가 있는 건 아니고, 각자 자신의 연구 주제를 추진하되, 서로 도움이 필요한 부분에서 함께 일하는 식이다. 논문도 각자 쓰기도 하고, 둘셋이 모여 쓰기도 한다. 함께 하는 연구 과정에서 각자의 역할이야 있겠지만, 서로 연구자로서 존중하는 자세는 잊지 않는다.
이는 토론할 때뿐만이 아니다. 실험이 예상 외로 저녁 시간까지 이어지면, 교수는 내게 다른 계획은 없는지 꼭 묻고 양해를 구한다. 가끔 내가 저녁 약속이라도 있으면, 교수에게 나머지 실험과 마무리를 부탁하기도 한다. 주말에 초전도 자석에 액체 헬륨을 충전할 일이 생기면, 가까이 사는 교수나 연구원이 나서서 이 잡무를 대신해 준다.
'60년 연구경력' '일흔의 제1저자' 노익장
다시 은퇴 후 연구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은퇴 후에도 과학 현장을 떠나지 않는 모습이 프랑스에 국한된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연구하는 좁은 분야만 들여다봐도 그렇다. 지금 그르노블 연구실을 방문 중인 캘리포니아대학(UCLA) 클락(W. G. Clark) 교수는 며칠 전 여든셋이 되셨다. 1995년에 은퇴했는데 지난해까지 실험실을 운영하셨단다. 은퇴 후에도 이십 년 가까이 현역 과학자였던 셈이다. 학교마다 학과마다 기준은 다르지만, 그분이 계신 곳에선 연구활동만 활발하다면 사실상 무기한 실험실과 사무실을 유지할 수 있단다.
» 사진 4. 물리 연구 경력 60년이 넘는 마이어 교수. 사진/W. Ketterle, 출처http://www.phy.duke.edu/~hm
또 다른 예로, 몇 년 전, 네덜란드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내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인 마이어(H. Meyer) 박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물론 그는 나를 모르기에, 우리 관계를 설명하며 내가 당신의 고손자뻘 제자라고 소개했다. 그가 놀라고 반가워한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나도 놀랐다. 4세대 앞선 스승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참고로 그의 첫 논문은 무려 1951년에 나왔다. 가장 최근 논문은 2012년, 바로 지난해이다. 그러니 아직 현역인 셈이다. 육십 년 연구 경력이라니, 꿈 같은 이야기다.
아무리 제도와 현실과 전통 덕을 본다 하더라도, 결국은 연구자 본인의 의지가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일흔이 훌쩍 넘은 일본 물리학자 야스오카(Yasuoka) 박사는 얼마 전 과학저널 <사이언스(Science)>에 제1저자로 논문을 발표했다. 플루토늄의 핵자기공명 신호를 최초로 발견했다는 보고였는데, 번득이는 생각보다는 남다른 끈기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제1저자는 실험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맡게 되는데, 일흔이 넘은 학자로는 드물다 할 수 있다.
그는 일본 대학에서는 진작에 은퇴했지만,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에 미국의 한 국립연구소에 방문교수 자격으로 건너가 지내고 있다. 그곳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실험을 하는 중이란다. 그를 아는 내 지인에게는 이런 말을 했단다.
“(두 손을 내밀어 보이며) 여보게, 내가 머리 쓰는 게 예전 같지 않겠지. 그런데 말이야 내 손은 실험하는 걸 기억하고 있더라고.”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듯이, 백발의 과학자가 실험하는 모습을 실제로 만나는 게 한국 현실에서는 여러 모로 어렵다. 하지만 과학 전통이 오래된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적어도 낯선 모습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대 간의 단절 없이 지식과 지혜가 삼대에 걸쳐 공유되는 연구실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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