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인의 "논문 읽어주는 엘레강스 펜클럽"

생물학 연구의 모델동물인 ‘예쁜꼬마선충(별칭 엘레강스)’을 연구하는 다섯 명의 젊은 연구자들이 발생과 진화를 비롯해 생물학의 굵직한 주제를 담은 최신 논문을 소개한다. 실험실 안과 밖의 진지하고 유쾌한 소통을 시작한다.

세포내 건강전략: 단백질 고쳐쓰기? 버리고 새로 만들기?

[3] ‘단백질 항상성’은 어떻게 유지되나?


단백질을 고쳐가면서 쓰는 것이 좋을까, 망가진 것은 버리고 새로 만드는 것이 좋을까? 건강한 생존 관리를 위한 세포의 전략은 무엇일까?


00elegance3_4.jpg » 고쳐서 다시 쓸 것인가? 버릴 것인가? 이는 세포 내의 단백질 항상성을 유지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사진은 중고품 시장에 나온 물건들. 한겨레 자료사진

이번 글의 주제 논문


Liu G, Rogers J, Murphy CT, Rongo C. EGF signalling activates the ubiquitin proteasome system to modulate C. elegans lifespan. EMBO J. 2011 Jun 14;30(15):2990-3003.



는 아이폰4에스의 사용자입니다. 산 지 1년 넉 달이 좀 더 지났는데 아직 꽤나 쌩쌩하고 좋은 성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가장 획기적인 아이폰이라는 아이폰5가 출시되었고 이제 많은 사람의 손에 들려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합니다. 아이폰4에스가 지원하지 않는 엘티이(LTE) 통신 기능을 사용할 수 있고 화면이 커지고 무게는 가벼워졌다는군요. 스마트폰의 기본엔진 격인 시피유(CPU)는 최대 두 배의 효율을 냅니다. 아이폰5를 가진다면 더 빠르게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고, 더 선명한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손 안에 들려 있는 휴대전화를 다시 들여다봅니다. 세월의 흔적이 전면 액정의 상처로 남아 있지만 여전히 쓸 만합니다. 멀티터치도 되고 걸어 다니면서 인터넷도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뛰어난 기능을 바라는 것은 쓸데없는 사치라는 깨달음이 스칩니다. 게다가 원한다면 약간의 비용으로 깨끗한 액정을 달아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분간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고쳐가면서 쓴다고 해보지요. 저는 언제까지 이 폰을 고쳐 써야 할까요. 적당한 시점에는 새 폰을 손에 넣어야만 새 시대의 햇볕을 쬘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야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고쳐 쓰기 vs 폐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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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에도 비슷한 고민이 존재합니다. 단지 화질 좋은 동영상을 보고 빠르게 인터넷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살고 죽는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훨씬 중요한 고민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 몸의 구성요소는 조금씩 닳을 수밖에 없지요. 재생이 불가능한 특정 뇌 세포는 시간이 지나면서 비가역적으로 소비되는 자원이라 할 수 있고, 자발적으로 펌프운동을 하는 심장도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집니다.


양한 요소에서 가장 핵심으로 유지되어야 할 부분, 특히 그것을 가장 작은 단위로 꼽는다면 단연 ‘단백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백질은 인체에서 물 다음으로 많은 질량을 차지하는 분자입니다. 몸의 뼈대를 세포 수준에서 구축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화학반응을 촉진하는 효소로도 작용합니다. 단백질은 구조와 기능이 매우 다양하지만 분자로 이루어진 물질인 만큼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다는 공통 특징을 가집니다. 자연스러운 3차원 구조가 세포 내외부의 충격에 의해 망가질 수도 있고 산화 반응에 의해 변형될 수도 있습니다. 생명체는 단백질의 질을 다양한 수준에서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안정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지요. 이쯤에서 이 글의 문제의식을 명확히 정리해 봅니다.


단백질을 고쳐가면서 쓰는 것이 좋을까요, 망가진 것은 버리고 새로 만드는 것이 좋을까요?


두 가지 관점을 세분화해 들여다 봅시다. 고장난 단백질을 고쳐가면서 오래 쓰면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요? 우선 이미 비용을 들여 생산한 것을 고치는 것이므로 추가 비용은 새 것을 통째로 만드는 데 비해 적을 확률이 높습니다. 휴대전화의 액정이 긁혔으면 새 액정을 끼우는 쪽이 새 전화를 사는 것보다 훨씬 쌉니다. 또 전원으로 사용되는 리튬이온 전지는 본질적으로 무한정 재충전할 수 없습니다. 수천 번의 방전과 충전을 반복하다 보면 전지의 능력이 감소하기 때문에 힘세고 오래 가는 전원을 원한다면 교체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교체할 수 있는 부분을 새 것으로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휴대전화의 전체 성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감소하기 마련입니다.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열이나 외부 충격 때문에 시피유 같은 핵심 부품이 닳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리를 한다면 시피유도 새것으로 갈아끼울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정도로 부품 교체에 집착한다면 아예 새 전화를 살 정도의 비용까지 든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단백질 건축가 ‘샤페론’과 단백질 분해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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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식으로 단백질을 관리할 것인가? 이 문제에는 그 단백질의 특성과 고장난 정도, 투자 여유 에너지의 양 같은 여러 요소를 고려해야 적절히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물론 생물로서도 쉬운 고민은 아닐 테지요. 이처럼 단백질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작용을 “단백질 항상성”이라 부릅니다. ‘항상성’은, 말 그대로 같은 기능과 상태를 항상 유지하려 한다는 뜻이겠지요.


백질 항상성은 여러 가지 단계에서 조절될 수 있는데, 샤페론(Chaperone)의 작용과 단백질 분해(Proteolysis)가 각각 ‘고쳐 쓰기’와 ‘폐기하기’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샤페론은 분자생물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단백질을 돕는 단백질’입니다. 샤페론은 세포 내의 단백질 건축가로서 다른 단백질의 정확한 삼차원 구조 형성을 돕습니다. 단백질을 만들기 위한 설계도는 디엔에이(DNA)에 내장되어 있지만 거기에 자동조립 체계까지 포함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조립은 유능한 건축가인 샤페론에 의해 대부분 이루어집니다. 이 건축가는 상당히 유능한 편이어서 설계도 대로 단백질을 생산하는 능력뿐 아니라 문제가 생긴 부분을 수선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세포에 고온이 가해지면 단백질이 변성되거나 서로 뭉쳐 기능이 망가지는 응집체를 형성하는데, 이 때 망가진 단백질들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역할에서 샤페론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이런 능력을 높이 사서 샤페론에게는 ‘열충격 단백질(Heat Shock Protein, HSP)’이라는 별명도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이제 ‘단백질 분해’에 관해 살펴볼까요. 단백질 분해는 유비퀴틴(ubiquitin)과 프로테아좀(proteasome)이라는 두 단백질의 협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유비퀴틴은 분해되어야 할 단백질에 붙이는 딱지라고 보면 됩니다. 프로테아좀은 딱지가 붙어 있는 단백질을 찾아다니다가 만나면 그것을 자기 몸 내부에서 분해해 버립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의 딱지로는 분해해도 되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딱지를 한꺼번에 여러 개 붙이게 됩니다. 분해된 단백질은 다시 개개의 아미노산이 되어 새로운 단백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단백질 항상성은 수명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성급하게 가설을 던져 보자면, 당연히 좋은 상태의 단백질을 잘 유지할수록 수명 연장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연해 보이는 이런 생각에 대한 실험적 증거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단백질 항상성과 수명의 연관성은 의외의 순간에 드러났습니다.



세포분열 관리 단백질이 수명연장과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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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백질 항상성과 수명을 연결해주는, 약간 난해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모든 이야기의 출발은 미국의 럿거스대학의 크리스토퍼 론고(Christopher Rongo) 그룹이 <엠보 저널(EMBO journal)>에 발표한 ‘표피생장 인자(Epidermal Growth Factor, EGF)’라는 물질에 관한 논문입니다 [주제 논문].


‘표피생장인자’라는 단백질을 좀 더 소개해보겠습니다. 수정란에서 시작해 성체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세포분열과 분화 과정을 통틀어 ‘발생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표피생장인자는 발생 과정에서 세포분열과 분화가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하며, 이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된 상태입니다. (표피생장인자를 발견한 미국의 스탠리 코헨(Stanley Cohen) 박사에게는 1986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이 수여된 바 있습니다.) 론고 그룹은 표피생장인자가 완전히 발생이 끝난 성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쁜꼬마선충에는 인간의 표피생장인자와 매우 비슷한 인자를 만드는 유전자(lin-3)가 있습니다. 그리고 표피생장인자에 결합해 세포 내로 신호를 전달하는 수용체를 만드는 유전자(let-23)도 있습니다.


인간의 것과 굉장히 비슷한 표피생장인자와 수용체가 선충에도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매개하는 세포 내 신호전달 과정도 인간과 비슷할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을 하게 합니다. 론고 그룹은 표피생장인자와 관련된 유전자의 기능이 망가진 예쁜꼬마선충 돌연변이체의 수명을 측정했습니다. 놀랍게도 표피생장인자 돌연변이 선충들의 수명은 정상적인 야생형 선충에 비해 감소했습니다. 이것은 뒤집어서 생각하면 정상 표피생장인자의 기능이 수명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는 말이 됩니다.


돌연변이 연구가 재미있는 점은 기능이 감소한 것뿐만 아니라 기능이 증가한 돌연변이 개체도 종종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수용체 유전자의 기능이 증가한 돌연변이도 존재하는데, 이 돌연변이는 표피생장인자가 없는데도 마치 있는 것처럼 세포 안에다 신호를 계속 보내는 수용체를 만듭니다. 즉 표피생장인자가 있거나 없거나 계속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기능이 증가하는 돌연변이체라고 할 수 있지요. 예상할 수 있다시피 이 돌연변이에서는 수명이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이 돌연변이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화로 인한 근육 감소도 지연되고 나이가 들수록 축적되는 색소 침착 현상도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훨씬 더 오랜 시간 왕성한 운동 능력을 보였습니다. 표피생장인자가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수용체의 착각으로 선충의 세포와 개체는 더 건강해지고 수명이 늘어난다니, 이렇게 효율 좋은 플라시보 효과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그림 1)

00elegance3_1.jpg » 그림 1. 다양한 표피생장인자 관련 돌연변이체들의 수명을 보여주는 그래프. 가로축은 시간의 흐름을 세로축은 살아 있는 예쁜꼬마선충의 비율을 나타냅니다. 정상적인 야생형(Wild type)과 비교할 때, 표피생장인자 기능 감소 돌연변이체인 let-23(n1045)는 수명이 감소하고 기능 증가 돌연변이체인 let-23(sa62)는 수명이 증가합니다. 출처/ Liu G. et al. EMBO J. 2011.

피생장인자가 보내는 신호의 강도와 수명 사이에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다음 단계는 도대체 어떻게 표피생장인자의 신호가 수명을 늘렸는지 중간 단계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생명과학자들이 “좋은 연구”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이 중간 단계가 명쾌하게 잘 밝혀진 연구입니다. 표피생장인자가 조절하는 신호들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경로의 신호에 의해 수명이 증가했는지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연구해볼 수 있는 방향은 표피생장인자에 의해 발현이 증가하거나 감소한 유전자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수용체 기능 증가 돌연변이체에서 변화된 유전자를 알아내려는 실험에 의해, 해독 작용, 스트레스 반응, 단백질 분해과정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발현이 증가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샤페론 유전자의 발현은 감소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바로 표피생장인자의 신호전달체계와 단백질 항상성이 관련 있지 않을까 하는 힌트가 드러난 것입니다!



장수 비결은 철저한 단백질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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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피생장인자가 수명을 늘리는 과정의 핵심이 단백질 항상성 조절 작용임을 보여주는 실마리가 나타나자, 증거를 더욱 철저히 수집하려는 연구가 뒤따랐습니다. 실제로 표피생장인자 돌연변이체에서는 단백질 항상성에 문제가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째로 많은 단백질이 산화에 의해 손상되어 있었습니다. 단백질 산화는 철이 녹슴과 비슷하게 단백질의 구조 안정성을 완전히 잃게 만듭니다. 산화에 의한 손상은 너무 심각해서 유능한 샤페론조차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표피생장인자 신호가 감소하면 비정상 단백질 응집체의 축적 속도가 증가해 세포 기능을 방해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증거는 단백질 분해과정을 개체 내에서 직접 측정함으로써 얻어졌습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유비퀴틴과 녹색형광 단백질(Green Fluorescent Protein, GFP)이 융합된 유전자(transgene)를 개체에 일부러 발현하도록 하여 색깔로 확인할 수 있는 녹색형광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 융합 유전자가 발현하면, 유비퀴틴이 달린 녹색형광 단백질이 생산될 터인데 ‘분해해 달라는 딱지(유비퀴틴)’를 달고 태어나는 셈이 됩니다. 그리고 딱지 검사자인 프로테아좀과 만나면 녹색형광 단백질은 분해 처분됩니다. 그러니까, 녹색형광 단백질이 얼마나 많이 발현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얼마나 분해되는지를 녹색형광의 시각 정보로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이런 실험 방법의 핵심입니다.


정상적인 야생형 개체에 녹색형광 딱지 유전자를 발현시켜 관찰하면, 녹색형광이 유충 시기에 표피에서 높게 유지되다가 생식 능력을 갖춘 성체가 되면 급격히 감소합니다. 이는 단백질 분해 작용이 초기 발생 단계에서는 낮고 일정하게 유지되다가 성체로 성숙하는 특정한 시기에 증가함을 의미합니다.(그림 2)

00elegance3_2.jpg » 그림 2. 유비퀴틴-녹색 형광 단백질 융합체의 작동 과정 모식도. 단순히 유비퀴틴과 녹색 형광 단백질을 연결시켜 놓으면 둘을 분리시키는 효소의 작용에 의해 유비퀴틴은 떨어져 나오고, 녹색 형광 단백질은 안정적으로 유지됩니다. 그런데 유비퀴틴의 특정 아미노산을 변형시켜 융합하면 분리 효소가 작용할 수 없기 때문에 결합이 유지됩니다. 하나의 유비퀴틴이 안정적으로 붙어 있는 상태이므로 추가적인 유비퀴틴 사슬이 형성될 수 있고 그 결과 녹색 형광 단백질은 분해됩니다. 정상적인 예쁜꼬마선충에서는 마지막 유충 시기(L4)에서 48시간 정도가 지나면 녹색형광 단백질이 완전히 분해되어 형광을 내지 못합니다. 대조군으로 사용된 붉은형광 단백질(Red Fluorescent Protein)은 유비퀴틴이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안정적으로 유지됩니다. 출처/ Liu G. et al. EMBO J. 2011.

그렇다면 표피생장인자 관련 돌연변이체에서는 어떨까요? 기능 감소 돌연변이체에서는 녹색형광이 성체에서 감소하지 않고 유지되었습니다. 단백질 분해가 잘 일어나지 않음을 의미합입니다. 반대로 기능 증가 돌연변이체에서는 야생형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녹색형광이 감소했습니다. 결론적으로 표피생장인자가 내는 신호가 단백질 분해를 촉진하는 것입니다.(그림 3)


00elegance3_3.jpg » 그림 3. 표피생장인자 돌연변이체에서의 단백질 분해 상황. 야생형에서는 마지막 유충 시기(L4) 이후 24시간 까지는 녹색 형광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표피생장인자 기능 증가 돌연변이체에서는 이 시점에 이미 녹색 형광 단백질이 분해됩니다. 이것은 표피생장인자가 단백질 분해를 더욱 빠르게 활성화시키도록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즉 표피생장인자는 폐기하는 전략을 취하도록 유도합니다. 출처/ Liu G. et al. EMBO J. 2011. 이로써 중간 단계에 대한 증거도 확보했습니다. 표피생장인자는 성체에서 손상된 단백질을 분해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분해 명령이 강하고 빠르게 발동될수록 개체의 수명이 증가한다는 것은, 고쳐 쓰는 것과 폐기하는 것 중에서 장수에 도움이 되는 전략은 후자라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재주 많은 건축가이자 수선공인 샤페론은 개체의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의해야 할 점은 이 연구가 표피생장인자라는 주인공의 관점에서 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수명을 조절할 수 있는 경로는 다양하기 때문에 그 중 하나인 표피생장인자에 의한 효과가 전부라고 단정하는 것은 과도한 단순화입니다. 표피생장인자에 의한 수명 증가의 이유가 단백질 분해를 촉진한 것 때문이기는 하지만, 무조건 단백질을 분해하려고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표피생장인자에는 샤페론의 발현을 저해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샤페론과 단백질 분해는 표피생장인자에 의해 반대 방향으로 조절되고 있는 것입니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런 조절이 무작위로 일어나는 확률적인 현상이 아니라 특정 유전자들에 의해 정교하게 조절되고 있는 프로그램의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유충 시기에는 어떻게든 잘못된 단백질을 다시 펼쳐서 고쳐 쓰고 응집체가 형성되지 않도록 최대한 막으려는 작용이 우세합니다. 성체 시기에는 고장난 단백질을 과감히 분해해 파괴하는 기작이 우세해집니다. 단백질에 축적되는 손상은 개체가 노화할수록 단순한 수리로는 복구 불가능한 단계에 이릅니다. 따라서 최대한 고쳐 쓰다가 일정 시점이 지나면 폐기하는 전략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표피생장인자에 의해 단백질 분해가 활발해지는 시점이 생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성체 시기라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아마 표피생장인자에 의해 유발되는 생리학적 변화는 생식 능력이 가장 좋은 시기에 개체의 건강을 극대화하기 위해 진화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젊은 성체 시기의 적응도를 최적화하려는 노력으로 노화와 관련한 변화에 대처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수명이 증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해 봅니다.



‘단백질 항상성’도 노화를 거스를 순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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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논문이 설명하는 단백질 항상성과 수명의 관계를 휴대전화 교체 상황과 완전히 동치로 놓을 수는 없습니다. 휴대전화는 개별 부품을 교체할수록 새것에 가까워지고 성능이 더 나아지지는 않을지언정 거의 제한 없는 사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단백질은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큰 손상을 입은 것을 완전히 분해하고 새것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노화는 진행됩니다. 새 단백질을 만드는 단백질공장도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단백질공장을 분해하고 새로 만들어야 하므로 추가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또 분해자의 역할을 하는 단백질도 영원히 불변할 수는 없습니다. 생산과 분해 활동은 모두 개체와 세포의 노화 상태에 따라 효율이 감소하는 것입니다.


가지 흥미로운 점은 표피생장인자가 언제까지나 좋은 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유전자가 시간적 또는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발현될 때에는 개체에 좋지 않은 형질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발생 초기에 세포분열을 촉진하는 유전자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유전자는 특정한 발생 단계에서만 활성화해 개체의 모습을 완성하도록 돕고 발생이 끝난 다음에는 억제된 상태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만약 발생이 끝난 개체의 세포에서 발현되었다가는 분열하지 말아야 할 세포를 분열하도록 유도해 암세포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논문에서 소개된 표피생장인자는 성체가 될 때까지는 정상적인 세포분열과 분화를 돕다가 생식 시기가 되면 단백질 항상성 조절 방식을 바꿈으로써 수명을 증가시킵니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은 역할만 하는 단백질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신기한 현상이지, 틀리거나 잘못된 현상은 아닙니다. 아마 아직 들여다보지 않은 단면 속에 부작용이 숨어 있을 수도 있고 계속 좋은 역할만 하는 것이 실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유전자와 동일한 프레임으로 해석될지 아니면 기묘한 영역의 유전자로 따로 묶일지는 아직 열려 있습니다. 하나의 논문이 해결해주는 질문이 있으면 새롭게 생기는 질문도 있습니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과 답이 이어지는 것이 과학 연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아닐까요.



함께 참고한 문헌


  • Avery SV, Molecular targets of oxidative stress. Biochem J. 2011 Mar 1;434(2):201-10.
  • Ben-Zvi A, Miller EA, Morimoto RI. Collapse of proteostasis represents an early molecular event in Caenorhabditis elegans aging. Proc Natl Acad Sci U S A. 2009 Sep 1;106(35):14914-9.
  • Hill RJ and Sternberg PW. The Gene lin-3 encodes an inductive signal for vulval development in C. elegans. Nature. 1992 Aug 6;358(6386):470-6.
  • Rongo C. Epidermal growth factor and aging: a signaling molecule reveals a new eye opening function. Aging. 2011 Sep;3(9):896-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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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현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유전과 발생 연구실, 박사과정
가치 있는 여러 가지 일 중에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생명과학 꿈나무입니다. 논문 읽고 실험을 합니다. 논문을 쓰고 많은 사람들에게 지적 즐거움을 주고 싶습니다.
이메일 : ssh88103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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